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5.18 민주화운동/학살 (문단 편집) === 계엄군의 무차별·무자비·무경고 폭동적 시위진압 === [youtube(DTZfdYGgglQ)] >「공수대원들 서너 명이 1개조가 되어 학생처럼 보이는 청년들을 무조건 쫓아가서 곤봉으로 머리를 때리고 공을 차듯이 가슴과 배를 내질렀다. 시위 군중은 불과 십여 분도 못 되어 산산이 흩어져갔다. 공수대원들은 골목마다 뛰어다니면서 주변에 숨어 있는 청년들을 두들겨 패고 나서 손목을 뒤로 하여 포승으로 묶고는 차에 던져올렸다. 차 위에서는 무전병이 기다리고 있다가 체포되어 올라온 즉시 발가벗기고 굴비 엮듯 엎드리게 하고는 계속 난타했다. 거리에는 일시에 살기가 맴돌았고 골목마다 비명과 흐느낌이 요란했다. 어떤 경우는 터미널 골목의 막다른 골목까지 달아난 학생이 드디어 잡히게 되자 자지러지게 무릎을 꿇으며 살려달라고 연신 빌었다. 대문에 나와 내려다보던 할아버지가 너무도 애처로워 몸으로 가리고 봐달라고 사정하자, '''공수대원은 "비켜 이 새끼!" 하면서 할아버지를 곤봉으로 내리쳤다.''' 할아버지는 피를 뒤집어쓰며 고꾸라졌고 쫓겼던 학생은 돌을 집어 들었으나 공수대원은 가차없이 곤봉으로 후려친 뒤에 대검으로 등을 쑤시고는 다리를 잡아 질질 끌고 길거리로 나갔다.」 >----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초판)』, 1985, 49쪽 18일 오후 4시 쯤 얼룩무늬를 입은 군인들이 유동 삼거리에 나타났다. 세 겹으로 횡렬을 지어 도청 쪽을 향해 다가왔다. 그러다 지휘자가 '제자리 서, 정렬'이라 하자 군인들은 횡단보도에서 일제히 멈춰서 대오를 가다듬으며 대기했다. 유동삼거리에서 몇 미터 떨어진 횡단보도였고, 북동 180번지와 누문동 62번지를 연결하고 [[광주제일고등학교]] 교문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그러다 정확히 오후 4시 정각이 되었다.[* 김영택, (박사학위 논문) 5.18 광주민중항쟁연구 96~97쪽.] 대열을 따라온 초록색 탑차량 위에 있는 스피커에서 목소리가 울려펴졌다. "거리에 나와 있는 시민 여러분, 빨리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빨리 돌아가십시오."라는 방송이었다.[* 실록 5.18 광주민중항쟁, 창작시대사, 김영택, 1996, 34쪽.] 이 때 시민들은 당시 상황을 그대로 지켜보기만 하던 상황이었다. 이런 방송이 있은 지 1분 정도 지났을까 말까 하는 짧은 시간이 지난 뒤, 엄청난 명령이 군인들한테 떨어졌다. >「'''거리에 나와 있는 사람은 전원 체포하라.'''[* 실록 5.18 광주민중항쟁, 창작시대사, 김영택, 1996, 35쪽.]」 이 딱 한마디가 다였다. 이 명령 이외 세세한 행동지침 따윈 없었다. 시위 해산이나 시위자 체포 같은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시위를 하던 학생들은 공수부대가 유동삼거리 쪽에 다가왔을 때부터 이미 대부분 잽싸게 빠져나간 상태였다. 그런데 난데없이 '전원 체포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한 박사학위 논문에선 이 명령을 '''광주 민중항쟁을 일어나게 한 폭탄선언'''이라 평가한다.[* 김영택, (박사학위 논문) 5.18 광주민중항쟁연구 99쪽.] >"거리에 나와있는 사람 전원 체포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이후 '광주살육'으로 확대 재생산된 이 명령은 '5.18 광주살육'의 신호탄이자 전두환 폭력정권의 창출을 예고하는 폭탄선언이었다.[*출처 [[http://www.aladin.co.kr/shop/book/wletslookViewer.aspx?ISBN=8990848504&mode=image|#]] ] >---- >[[김영택(1936)|김영택]], 5월 18일 광주 광주민중항쟁 그 원인과 전개 과정 '''거리에는 지옥이 열렸다.''' <전교사 상황일지>(5.18)에는 '7공수대 총검진압'이라고 적혀 있고, 안기부에서 1985년 작성한 자료에도 '반란 7공수여단 착검진압'이 명시돼있다. 군인들은 진압봉과 착검한 소총을 겨누어 잡고 인간사냥에 나섰다. 곧이어 11대의 군용 트럭이 횡단보도에서 50m 떨어진 서석병원 앞길에 정차하고 군인들을 쏟아냈다. 그 군인들 역시 무차별로 시민들을 공격했다.[* 김영택, (박사학위 논문) 5.18 광주민중항쟁연구 99쪽.] 시민들은 공포에 빠졌고, 공수부대에게 걸린 시민은 여러 곳으로 도망을 갔다. 하지만 공수부대원들은 그런 시민들을 끝까지 추격하여 붙잡았고 곤봉, 개머리판, 군화발로 무자비하게 폭행하였다. 그러고는 옷을 벗겨서 군용 트럭에 싣고 가버렸다. 여기저기서 욕설과 비명소리가 난무했고, 삽시간에 거리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2007년 국방부의 진상 규명에 밝혀진 내용에 따르면 당시 공수부대는 '''시위 진압을 위해 폭력을 쓴 게 아니라 체포를 위해 폭력을 썼다.''' 공수부대는 시위를 안 한 시민들까지 포함해 무차별 진압봉 공격과 대검 공격을 벌인 것이다.] || [[파일:인간사냥1.jpg|width=400]] || [[파일:인간사냥2.jpg|width=420]] || || 시민들을 폭행하는 반란군 || 시민들을 끌고 와서 [[얼차려]]를 시키고 있는 반란군 || 이러한 7공수여단의 행위에는 '''이유나 원칙도 안 보였다'''고 당시 기자였던 [[김영택(1936)|김영택]]은 증언하고 있다.[* 김영택, (박사학위 논문)5.18 광주민중항쟁연구 100쪽.] 아래에 나와있는 수많은 증언들과 사례들을 보아도 이는 명백하다. >「기동대원들은 갑작스런 공수부대의 출현을 다행스럽게 여기는 반면 의아스럽게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 >공수대원들의 인상은 한마디로 끔찍했다. 술이나 약물에 취해 있었다고는 확실히 말할 수 없으나 살기가 도는 느낌이었다. 또한 그들은 진압에 나오면서 임전태세를 갖추고 나왔을 것이며 명령에 의해서 죽으라면 죽을 정도로 훈련 속에서 단련된 사람들이었다. > >공수부대의 모습을 본 시위대는 무서움에 한 순간 모두 도망가고 보이지 않았다. 남아 있는 몇몇 사람들은 아마도 시위에 가담하지 않은 방관자나 구경꾼들일 것이라 생각되었다. 우리도 같은 군인의 입장이었지만 무섭다고 느낄 정도였으니 시민들 역시 말할 나위가 없었을 것이다. > >공수대원들은 일사불란하게 진압자세를 취했고, 대장으로 보이는 지휘자는 '시민 여러분, 해산하십시오' 하고 핸드 마이크로 외쳐댔다. > >얼마 지나지 않아 공수대원들은 3-5명씩 무리를 지어 시위대를 향해 쫓아가 불문곡직하고 시민들을 곤봉으로 내리치고 군화발로 차는 등 터무니없는 무력행사를 하는 것이었다. 기동대는 중앙극장 앞에서 방패를 들고 겁먹은 표정으로 공수대원들의 진압 과정을 지켜보면서 해도해도 너무한다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기동대는 목격자가 되어 다소 안정감 속에서 공수부대에게 적의를 느끼며 구경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수대원들의 무자비한 진압은 오히려 시민들의 시위를 자극할 뿐이었다.''' > >공수대원들은 시민들을 무작정 두들겨 팬 뒤 기진맥진한 상태의 사람을 질질 끌어다 트럭에 실었다. 트럭에는 더 이상 실을 수 없는 상태가 될 때까지 사람들을 트럭에 던져댔고, 공수대원 2명은 트럭 위를 걸어다니며 사람들을 차 바닥에 바짝 엎드리게 하면서 꼼짝하지 못하게 했다. 공수대원은 총을 들고 서서 마치 짐승 다루듯 군화발로 지근지근 밟았다. 사람들은 차 바닥에 엎드려 신음했고, 옷은 갈기갈기 찢어져 등까지 살이 벗겨졌다. > >트럭은 불과 몇 초 만에 사람들로 가득 찼다. 잡혀온 사람들로 가득 채워진 트럭은 어디론가 가버렸다. 아마도 상무대나 31사단으로 옮겼을 거라고 짐작했다. 날이 어둑어둑해질 무렵까지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진압은 계속되었다. 공수부대가 나타난 이후 기동대는 진압은 하지 않고 쉬면서 공수부대의 진압 과정을 임무 수행하듯 지켜보았다. > >8시경 공수부대가 장악한 거리를 뒤로 하고 기동대는 부대로 복귀했다. 통금시간이 당겨진 이유로 9시경 점호를 마치고 바로 잠을 잤다. > >이날의 충격적인 일들을 경험한 나는 대원들 2명과 함께 죽음의 도시, 칠흑 같은 화정동 잿등을 지켜보며 소주를 마셨다. 대원 중 몇 명은 너무나 끔찍한 광경을 떠올리고 잠을 못 이루며 울먹이고 있었다. 우리들 역시 공포와 분노를 느끼고 공수대원의 강렬한 인상과 참혹했던 진압 모습을 다시 생각하면서 앞으로 어떻게 될까 걱정했다. >---- >- [[http://cnu518.jnu.ac.kr/bbs/board.php?bo_table=sub6_03_01&wr_id=44&sfl=wr_subject&stx=%EB%B0%95%EC%8B%9C%ED%9B%88&sop=and|박시훈(당시 의무전경), 의무전경으로 시위진압에 나서]]」 >「젊은 여성이나 양복이라도 반반히 입은 청년들에 대한 계엄군의 폭행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젊은 청년이 계엄군에 발각되면 일단 워커발로 짓이기고 몽둥이 찜질을 한다. 생명의 위험을 느낀 청년이 달아나면 끝까지 추적, 그 청년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더 이상 운신을 못할 때까지 갖은 폭력을 행사했다. 내가 목격한 장면 중 한 청년은 금남로 중간에서 계엄군에게 붙들려 얻어맞다 옆 골목으로 도주해 무등고시학원으로 도피했는데, 뒤쫓던 계엄군은 고시학원 계단 위를 무장한 채 따라가기에는 거추장스러워지자 소총에 장착된 대검을 뽑아 청년의 등 뒤에 던졌다. 이어 합류한 한 무리의 병력은 학원 안에서 공부하고 있던 수험생들을 무자비하게 내갈겼다. >---- >- [[김충근]](동아일보 사회부 기자), 금남로 아리랑, 5.18 특파원, 212」 || [[파일:ZulUq6j.jpg|width=400]] || 거리를 완전히 점령한 계엄군 || 한 청년을 곤봉으로 내리치고 있는 계엄군 [[의무병|위생병]][* 2019년 오마이뉴스 취재 결과, 사진 속에서 구타당하는 사람은 박남규 씨(당시 24세)로 밝혀졌다. 박남규 씨의 형이 바로 훗날 시민군 상황실장이 되는 박남선 씨(당시 27세)이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535978|#]]][* 참고로 5.18 민주화운동을 유혈 진압, 비시위자인 일반 시민들마저 학살한 신군부의 지휘에 따른 계엄군들은 내란목적살인죄 뿐 아니라 내란방조죄, 특수폭행죄, 특수살인죄 등이 적용되어도 모자랄 판이지만 '''우선 그런 폭력에 부상을 입은 시민을 의무대, 지방병원과 군 병원으로 옮겨 치료해야만 하는 것이 의무병들의 주 임무이자 사명인 것을 다들 알 것이다.''' 일반부대 의무병이라 해도 모자랄 판에 '''극한의 작전 상황에서 다친 전우들이나 민간인을 자신이 대열에 끼어 있는 특전사 부대원들에게 보호를 받으며 치료, 응급 후송하는 것이 특수부대 의무병인데 사진 속 의무병은 치료는커녕 부상자를 두들겨패는 최악의 반인륜 전쟁범죄행위와 [[직무유기]]를 벌인 셈으로, 계엄군 사병 중에서도 특히나 죄질이 중한 악질 폭력범죄자다.'''] || >「일요일이었다. 날씨는 아주 화창했다. 평균 기온 16.3도로 아침은 약간 쌀쌀했지만 낮의 최고 기온은 25.1도까지 올라간 아주 쾌청한 날씨였다. >세째 일요일이어서 상가에는 문을 닫고 쉬는 점포가 눈에 띄게 많았다. 한달이면 대개 첫째와 세째 일요일은 쉬는 날로 정하는 점포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농촌에는 바야흐로 모내기철을 앞두고 그 준비에 온 힘을 쏟고 있어서 집앞과 논밭에는 활기가 넘쳐 흘렀다. >그런 일요일이었다. >광주직할시 북구 북동 180번지 앞 큰길. 금남로의 연장이어서 그냥 금남로길이라고 불리어지는 길이다. >...얼룩무늬 군복에 머리에는 방석망이 달린 헬멧을 쓰고 손에는 방패와 방망이를 든 1개중대 가량의 공수부대 군인들... 대결이 이 횡단보도 위에 도착할 무렵 내려진 명령이었다. 그러자 군인들은 횡당보도선에 맞추어 일제히 멈추어서서 대오를 가다듬고 있었다. >유동 3거리에서 450m쯤 떨어진 횡단보도. 여느 횡단보도와 마찬가지로 하얗게 칠해져 있었다. 이 횡단 보도는 북동 180번지와 누문동 62번지를 연결하고 [[광주제일고등학교]]로 들어가는 길로 이어져 있다. >짧고 숨막히는 시간이 흘렀다. 시계의 짧은 바늘이 4자 위에 서고 긴 바늘이 12자 위에 이르렀다. >바로 4시 정각이었다. >바로 이때였다. 대열을 따라온 초록색 1.5톤급 차량 위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갑자기 찢어지는 듯한 금속성으로 위압적인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거리에 나와있는 시민 여러분, 빨리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빨리 돌아가십시오." >...스피커에서 귀가를 종용하는 방송이 나온 지 1분이 지났을까. 이번에는 짧은 순간을 두고 엄청난 명령이 뒤따라 튀어나왔다. >시민들에게 한 것이 아니라 지휘관이 부하들에게 내린 명령이었다. >'''"거리에 나와있는 사람은 전원 체포하라."''' >딱 한마디. 이 명령 이외 어떤 세세한 행동지침이 나올 법한테 그렇지도 않았다. 아무런 군더더기도 없었다. >... >이 명령이 떨어지자 현장은 순식간에 수라장으로 돌변해버렸다... 시위했던 학생들만 잡는 것이 아니라 젊다고 보여지는 사람이면 보는 대로 두들겨 패고 잡아 끌었다. 순간적인 일이었다. 비명소리와 고함소리가 사방에서 터져나왔다. >... >'저놈 잡아라' '저기 간다'는 소리와 동시에 '아이구' '억' 소리가 터져 나와 거리는 삽시간에 지옥으로 변해버렸다. >횡단보도 바로 옆, 북동 276번지 3층 건물 2층에 있는 [[동아일보]] 광주지사도 예외가 아니었다. 2명의 공수부대원이 고양이가 쥐를 잡으려는 듯한 자세로 뛰어 올라왔다. >두 사람 모두 대검이 꽂혀 있는 M16 소총을 앞으로 내밀고 서슬이 퍼렇게 되어 있었다. 마치 총검술 시범을 보이는 자세처럼 착검한 M16 소총을 앞으로 겨누고 있었다. 곧 아무에게라도 방아쇠를 당겨 버릴 자세, 아니면 금방 찔러 버릴 듯한 그러한 모습이었다. >... >마침 일요일인데도 출근한 정은철 총무는 바깥의 시끌벌적한 사태와는 관계 없이 자기 책상에 앉아 무엇인가 열심히 쓰고 있었다. >그는 '시위를 한 일도 없음은 물론 구경조차 하지 않았던 터라 무슨 상관이 있으랴'는 듯 태연하게 자기 일을 부지런히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두 군인은 다짜고짜로 정 총무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정씨는 의자와 함께 뒤로 벌렁 넘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두 군인은 정씨를 마구 짓밟고 개머리판으로 짓이기는 것이었다. 곧 숨이 끊어질 것 같았다.''' 큰 일이었다. >... >정 총무는 얼마나 맞고 밟혔는지 반항하는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고 있었다. >두 군인은 사무실 바닥에서 기진맥진해 찍 소리도 못하는 정 총무의 두발을 양쪽에서 하나씩 붙잡고 끌고 내려갔다. 바닥에 끌린 채였다. 마치 죽어있는 짐승을 끌고 내려가는 것 같았다. 2층 계단을 내려갈 때도 그대로 끌고 내려갔다. >...이 날 그는 자기가 맡은 구역의 수금 실적이 나빠 하루 전날 지사장으로부터 질책을 받고 일요일인데도 출근했다가 당한 것이다.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담당 구역 수금을 하기 위해 출근한 '''배달학생 박준하 군(광주공고 1년)도 수없이 맞고 짓밟혔다. 그리고나서 끌려나가다 계단에서 실신해버렸다. 그러자 비로소 그들은 그대로 팽개쳐 두고 내려가 버렸다.''' >...동아일보 광주지사 바로 앞쪽에는 2대의 트럭이 유동 3거리 쪽을 향해 정차해 있었다. >... >그 차량에는 길거리와 건물 안팎에서 붙잡혀 끌려온 사람들이 가득가득 실리고 있었다. 얼마나 맞고 밟혔는지 머리와 코, 입에서 피를 토해 내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그들의 하얀 옷자락은 피에 젖어 엉망으로 되어있었다. >어떤 사람은 기진한 듯 눈만 껌벅껌벅하는 모습도 보였다. >한 사람이 붙잡혀왔다. 그의 머리나 코에서는 피가 줄줄 쏟아져내렸다. 웃옷은 갈기갈기 찢겨진 채 핏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다. >끌고 온 군인이 대기 중인 군인에게 인계하면 또 한 차례 군화발이 날아오고 몽둥이 세례가 쏟아졌다. 그리고 짐짝 실리듯 트럭 위로 이끌려 올라갔다. 그러면 거기에 있는 또 다른 군인이 '이 새끼 머리 숙여'라며 군화발로 머리와 등을 짓밟는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아야 끝이 난다. >... >그때 마침 택시 한대가 지나가려다가 이들에게 붙잡혔다. >감색 양복에 하얀 와이셔츠를 입은 젊은 남자와 색동 저고리에 빨간 치마를 입은 예쁜 새색시가 차에서 끌려 나왔다. 한 눈으로 보아도 신혼 부부임에 틀림 없었다... 이 길은 시내 중심가에서 광주공항이나 고속버스 터미널 또는 광주역으로 빠져나가는 길목이다. 그래서 이 신혼 부부는 공항이나 역 쪽으로 가고 있는 듯했다. >그들조차도 예외가 아니었다. 택시에서 끌려나오자마자 신랑은 무자비한 몽둥이와 장작개비 그리고 군화발 세례를 받았다. 이유도 없었다. >순식간의 일이었는데 신랑은 '아이구, 눈이야'하고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눈을 붙잡고 땅바닥으로 뒹굴고 있는 것이 아닌가 >... >신부도 군화발로 채였는지 한복은 엉망이 된 채 갈기갈기 찢겨져 있었다. >"사람 살려!" >신부는 자신의 몰골은 돌아보지도 않고 땅바닥에서 뒹굴고 있는 신랑을 붙잡고 엉엉 울며 절망적으로 울부짖었다. >"이 쌍년" >군인들은 또 다시 신부를 걷어차며 욕지거리를 하더니 '빨리 꺼져'라고 소리를 질렀다. >---- >-당시 동아일보 광주 주재기자 김영택의 증언. 김영택, 현장기자가 쓴 10일간의 취재수첩, 1988, 사계절, 11~22」 당시 그 현장은 심재영 심산부인과의원장도 목격했는데, 여기서 "신혼 부부" 증언이 김택영 기자 증언과 교차 검증된다. 심재영 심산부인과의원장의 증언을 보면 이 신혼 부부는 카메라로 찍다가 구타 당한 듯 하다. >공수부대가 진입해 시민들을 무차별 구타하는 처음 장면을 직접 볼 수 있었다. 공수부대가 처음으로 구타나 마구잡이식 진압이 시작되는 곳이 계림종지역이었다고 생각되나 아마 거의 같은 시각에 수창국민학교 앞에서도 공수부대원들이 나타났다. 시간은 대략 18일 오후 3시경으로 짐작하고 있는데 병원 앞에서 수창국교 부근까지에서 학생들과 공수부대가 처음에는 대치하고 있었다. 공수부대에는 군인 짚차가 한 대 있었고 V자형으로 15명 정도가 도열해 있는 가운데 중간지휘자가 대열의 중간 뒤쪽에 서 있었다. 얼마 후 이 지휘자는 무언가 명령을 내렸는데, 이 때부터 공수부대원들이 학생들과 시민들을 쫓아가 닥치는 대로 구타를 가하기 시작했다. >당시 공수부대원들은 쑥색 얼룩무늬 옷을 입고 머리에는 한쪽이 균형이 맞지 않는 공수부대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이들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얼굴은 검정색이 도는 구릿빛이면서도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고, 표정 자체가 꼭 술 먹고 화난 사람처럼 심상치가 않았다. 아무리 보아도 정상적인 얼굴 표정은 아니었으며 수창국교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다른 지역에서도 동시에 무차별 가격이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때 '''별 생각 없이 구경하던 사람들이 갑작스레 구타를 시작하자 도망가지 못하고 심하게 맞은 경우가 많았다.''' >이 때부터 병원으로 부상자와 환자들이 몰려오기 시작해 치료와 함께 사실은 병원 뒤쪽 담을 통해 피신시키는 일을 했었다. 부상 환자는 대부분 상처가 오른쪽 머리 부위에 많았는데 오른손잡이 공수부대원이 도망가는 사람을 때렸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도망가는 사람은 대부분 뒤쪽에서 때린 상처가 많았으며, 곤봉으로 맞아 3~5cm 정도가 찢어져 있어 꿰매고 또 병원 앞으로 보낼 수 없어 담을 넘어서 보내곤 했다. 대부분 부상자는 가명으로 치료했으며, 13~14명 정도의 부상자를 그날 치료한 것 같다. > >신혼 부부까지 무자비한 구타 > >가장 기억에 남는 환자는 신혼 부부로 당시 공용터미널 중간 부분에서 택시를 타고 가다가 공수부대원들이 택시를 세우고 이 부부를 끌어내려 무작정 곤봉 등으로 때렸다는 것이다. 남편은 아래턱이 빠진 상태로 심한 부상을 입었으며, 부부가 함께 머리 등에도 상처가 났었다. 나중에 이 부부가 병원에 다시 온 적이 있었는데 남자는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것 같았다. >당시 공수부대원들이 학생이나 구경하던 사람을 때릴 때는 3~4명이 한 사람을 거의 반 죽음 상태까지 집중적으로 구타하는 수법을 써서 부상자들은 두피가 갈라지고 그 자리에 피가 범벅이 되어 있었다. >이들 부부도 택시에서 신혼 부부답게 카메라를 들고 있었는데, 공수부대원 여러 명이 달려들어 집중 구타를 해 남자는 거의 반죽음 상태였고 여자는 옷이 다 찢어져 입을 수가 없었다. 병원에서 아주머니들이 옷을 입혀서 산수동 쪽으로 데려다 주었는데 정말 딱한 일이었다. >---- >심재영(심산부인과의원장. 당시 심산부인과의원장), 상대는 대부분 오른쪽 머리 부위, 5.18 의료 활동 <자료 기록 및 증언>, 광주광역시의사회, 206~207 지나가거나 시위를 하던 많은 여성들도 공수부대에 걸려 잔인한 구타를 당했다. >「젊은 여성들의 경우 계엄군은 다짜고짜 블라우스 등을 찢어 걷어내거나 대검으로 바지와 치맛자락을 찢어 여자를 거의 나체 상태로 만든 다음 폭행을 가했는데, 방망이나 구둣발길이 날아가는 신체의 부위가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곳이었다... 젊은 여자, 그것도 옷 맵시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고 예쁘장한 여자일수록 가해지는 폭력은 더 심했고, 옷을 찢어발긴다든지 가격하는 신체 부위가 여체의 특정 부위들에 집중되었을 때 그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되겠는가? '''백주겁탈, 폭력난행, 성도착적 무력진압 등의 표현들이 얼핏 떠올랐으나 그것 역시 광주 상황을 전하기엔 적절치 못하였다.''' >---- >-김충근(동아일보 사회부 기자), 금남로 아리랑, 5.18 특파원, 212~214」 >「공수 놈들이 여고생을 붙잡고 대검으로 교복 상의를 찢으면서 희롱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60살이 넘어 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아이고, 내 새끼를 왜들 이러요?' 하면서 만류하자 공수놈들은 '이 씨팔 년은 뭐냐? 너도 죽고 싶어?' 하면서 군화발로 할머니와 배와 다리를 걷어차 할머니가 쓰러지자 다리와 얼굴을 군화발로 뭉개버렸다. 그리고 '''그들은 여학생의 교복 상의를 대검으로 찢고 여학생의 유방을 칼로 그어 버렸다.'''[* 5.18과 관련해 그 잔악성을 드러내 주는 이야기 중 하나가 '계엄군이 여학생의 유방을 총검으로 도려냈다'는 것으로, 당시 시위 참가자 한 명이 증언한 바 있다. 병원 기록 확인 결과 유방이 도려진 사례는 없었다. 당시 19세였던 최 모 양의 유방이 칼로 그인 사례(유방과 겨드랑이 사이 자상)는 있었다고 한다. 다행히 최 양은 살아서 4주 후에 퇴원했다고 한다.] 여학생의 가슴에서는 선혈이 가슴 아래로 주르르 흘러내렸다. >---- >-박남선, 피고인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121~122」 >「 11대 군용 트럭의 대열 맨 마지막 차량 위에서는 22~23세 가량의 처녀인 듯한 여성이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수모를 당하고 있었다... 하얀색 투피스 스타일의 윗옷은 피투성이가 된 데다 갈기갈기 찢겨진 채 옷을 입었다기보다는 젖가슴이 보일 정도로 걸처져 있었고 아랫도리는 완전히 벗겨진 채였다. 아가씨는 얼굴을 가리고 흐느끼고 있었다. 처녀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치부를 가리기 위해 두 다리를 [[소아마비]] 환자처럼 구부리고 있었다. 발 아래에는 그녀가 입었던 팬티며 스커트가 피로 얼룩진 채 함부로 버려져 있었다... 그녀는 차량 옆에서 군홧발로 채이고 진압봉으로 두들겨 맞아 쓰러져 있었다. 그러자 군인들이 '이년 봐라'하면서 옷을 붙잡고 일으키다 옷이 찢겨져 버렸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 군인들이 다시 '쌍년 올라가'라고 욕지거리를 하며 군홧발로 걷어차자 차 위로 올라갔는데, 또 다시 발길질로 군인들이 그녀를 맞았던 것이다. 윗옷마저 거의 찢겨져 완전히 나체 상태로 바뀌기 직전이었다. >---- >- 김영택(동아일보 기자), 실록 5.18 광주민중항쟁, 창작시대사, 1996, 40쪽」 공수부대원들은 이런 여성한테 옷을 입혀주는 행위조차 막아섰다. >「이때 한 40대의 남자가 하얀 가운을 들고 나와 이 아가씨에게 던져 주려다 군인들에게 붙잡혔다. 공수부대원들은 이 남자에게도 군홧발과 몽둥이 세례를 여지없이 가했다. 그는 바로 옆에 있는 서석병원 사무장이었다. 병원장 김상수(45) 박사로부터 가운과 팬티를 구해다 주라는 지시를 받고 병원 간호사의 것을 들고 나왔던 것이다. 16시 45분쯤이었다. >이 같은 광경은 행인은 물론 이 건물 저 건물 안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 보고 있었다. 시민들은 살기등등한 공수부대원들의 행패를 이미 겪었거나 눈으로 직접 목격했던 터라 감히 나와서 만류하거나 제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공수부대원들의 만행에 대한 탄식은 자신도 모르게 이 입 저 입에서 튀어나왔다. >...한 마디, 두 마디가 모여 군인들의 귀에도 들렸음인지 그들은 병원 사무장이 던져주려 했던 가운을 홱 던지며 "입어"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 해 비틀거리며 얼굴을 감싼 채 군인들의 무리 속에서 빠져 나와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 >- 김영택(동아일보 기자), 실록 5.18 광주민중항쟁, 창작시대사, 1996, 40쪽」 ||<|3> [[파일:7oPPIm3.jpg|width=400]] || [[파일:계엄군에게 붙잡힌 사람들.gif|width=400]] || || 반란군에게 붙잡혀 옷이 벗겨진 사람들 || || [[파일:계엄군에게 붙잡혀 트럭에 널브러진 사람들.jpg|width=400]] || || 공수부대원에게 애절하게 빌고 있는 한 시민 || 반란군의 군용 트럭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시민들 || 공수부대원들은 [[광주제일고등학교]]까지 들이닥쳤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났던 곳인데, [[일본제국 경찰]]조차 함부로 드나들지 않았다. 그 잔악하던 [[일본제국 경찰]]들마저도 적어도 교장실에 들러 사전 양해는 구하고 연행해갔는데, '''공수부대원들은 군화를 신고 그대로 교실에 들어가 수업받던 학생들을 짓밟았다.''' 이날 교실에 있던 학생들은 10대 때 고등학교를 다니지 못해 그 과정을 이수하기 위해 [[방송통신중 · 고등학교|방송통신고교]]에 적을 두고 일요일 수업을 받던 어른 학생들이었으며, 시위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다. 학자금이 없어 정규 고교에 진학하지 못한 사람, 직장 때문에 공부하지 못했던 사람들이었다. 정복을 입고 있던 한 육군 간부도 [[하극상|두들겨 맞았다]]. 그 군인은 재빨리 뛰쳐나와 교문 밖으로 나왔다. '''"나도 군인인데 어떻게 저럴 수 있는가"'''라며 말하며 빠져나갔다. 눈물이 난 건지 눈 언저리를 계속 문지르고 있었다.[* 김영택, (박사학위 논문)5.18 광주민중항쟁연구 103쪽.] 그날 고등학교에선 체육대회를 했는데, 그 대회에 참여한 사람들도 수난를 당했다. 조선대 의대 4학년 재학 이민오 씨는 광주일고에서 하는 동문 체육대회에 참여했다가 공수부대원들에게 쫓겼다. 그러다 교장관사에서 막혔고 공수부대원들한테 무자비하게 구타당했다. 엄청난 중상을 입었는데 '''[[췌장]]과 [[비장]]이 파열됐다'''고 한다.[* 12.12, 5.17, 5.18 국방부 보고서 70~71쪽.] >「1980. 5. 18. [[조선대학교]] [[의과대학]] 4학년에 재학 중이던 이민오 씨는 [[광주일고]]에서 있었던 동문 체육대회에 참여했다가 주변에서 쫓아온 공수부대원들을 피해 광주일고 교장관사까지 도망쳤다. 하지만 교장관사의 안방까지 추격해 온 공수부대원들에 의해 구타당한 뒤 광주 서부경찰서를 거쳐 상무대로 연행됐다. 5. 19. 밤 상무대 영창에서 심각한 복통과 구토를 호소한 그는 이날 24:00경 광주국군 통합병원으로 옮겨졌다. 후송 당시 구타 후유증으로 췌장 및 비장 파열, [[복막염]] 등이 발생하여 위험한 상태였다. >---- >- 12․12, 5․17, 5․18사건 조사결과보고서, 70~771」 그 무차별 폭력 속에서 결국 사망자가 나왔다. '''사망자는 청각장애인이었다.''' [[김경철]] 씨다. 그는 평범한 시민들이었고 시위에도 참여하지 않았으나, 공수부대의 잔혹한 폭동으로 인해 처참하게 맞아 죽었다. [youtube(sYSLWVjJj8Y)] >「[[김경철]] 씨는 귀가 들리지 않고 말을 할 수 없는 장애인이었다. 갓 백일이 지난 딸이 있는 평범한 가장이었던 그는 친구들과 점심식사 뒤 집으로 돌아오던 중 공수부대의 눈에 띄어 무차별 구타당했다. 부상당한 그는 적십자병원으로 옮겨졌으나 19일 03:00에 사망했다. 검찰 검시조서에는 후두부 찰과상 및 열상, 뇌안상검부열상, 우측 상지전박부 타박상, 좌견갑부 관절부 타박상, 진경골부, 둔부 및 대퇴부 타박상 등이 사인이며, 사망진단서에는 후두부타박상에 의한 뇌출혈이 직접사인었다. 그의 시신은 군 당국에 의해 광주통합병원 영안실로 옮긴 후 상무대 내 101사격장에 매장됐다가 가족들에 의해 망월동에 안장했다. >---- > - 12.12, 5.17, 5.18 국방부 보고서 70쪽」 다방에선 청년 한 사람의 머리를 잡고 끌어내서 포승으로 묶은 뒤 트럭에 내던졌다. 청년의 머리에는 피가 흘렀다. 여자 하나가 '학생이 아니다'라고 울부짖자 공수부대원들은 땅에 내동댕이쳤다.[* 중앙일보 취재기록. 출처: 5 18 특파원 리포트, 183.] 당시에 기록된 5.18 사태일지에 따르면, 조선대 입구 철로변을 지나가던 학생 11명을 공수부대원들이 총개머리판으로 구타하는 일이 벌어졌다 한다.[* 12.12, 5.17, 5.18 국방부 보고서 72.] 공수부대의 '''폭동'''이 어찌나 잔혹했던지, 이를 지켜보던 시민들은 진저리를 쳤다. 당시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이런 말을 했을 정도로 공수부대의 폭동은 잔혹한 것이었다. >「어느 할아버지는 '저럴 수가 있느냐. 나는 [[일제강점기|일제]] 때에도 무서운 순사들도 많이 보고, [[6.25 전쟁|6.25]] 때 공산당도 겪었지만 저렇게 잔인하게 죽이는 놈들은 처음 보았다. 학생들이 무슨 죄가 있기에 저러는가. 죄가 있다고 해도 저럴 수 없다. '''저놈들은 국군이 아니라 사람의 탈을 쓴 악귀들이야'''' 하면서 통곡했다. 어느 중년의 사내는 '나는 [[베트남 전쟁|월남전]]도 참전해서 [[베트콩]]도 죽여봤지만, 저런 식으로 죽일 바엔 그냥 총으로 쏴 죽이지. 저놈들을 죽여버려야 해' 하면서 오열을 터뜨렸다. 온 거리는 피의 강, 울음의 바다가 되었다. >---- >전남사회운동협의회 편, [[황석영]] 기록.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51」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